8화 -당신만을위한 선물
즐거운 추석. 풍성한 추석
식구들과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
핫핫. 너무 고스톱만 치지 마시고
즐거운 마음으로
이제부턴 포커다.
======================== 연휴 첫 날. 벌써 오링 =====================
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
그는 나에게로 와서
꽃이 되었다.
==김춘수의 꽃==
그녀가 나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건
당시로선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.
물론 자기소개도 제대로 한 적 없던
내 잘못도 크긴 하지만.....
뭐 어찌됐건
지금까지 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
세상을 살아왔던 난
여전히 그녀 곁을 맴돌고 있다.
첫날 견학을 마친 난
곧 가입원서를 내고 연극부 부원이 되었으며
얼마 지나지 않아
그녀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.
그 중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만한 건
그녀가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이다.
....... 그 외에 별다른 수확은 없다.
....그것만 해도 어딘가?
아무튼....
난 지금도 연습실 한 쪽 구석에서
사람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
정보수집을 계속하고 있다.
우선
연습실에서 제일 처음 만났던
안군이라는 남자는
현재 2학년으로
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잘 치고
연극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고 있는 것 같다.
안군
-내게 빛이 되어준 사람이 있어요.
너무나도 사랑스런....
내게.....좀 아닌가?
지금도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
연극에 쓸 노래를 만들고 있다.
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
남자인 내가 볼 때....
그냥 느끼해 보인다.
원채 음악 같은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
잘 부르는 지 못 부르는 지도 모르겠고
노래가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겠고....
오직 내가 부러운 점은
그가 노래를 부르는 근처에
여자 부원 세 명이 무릎을 팔짱낀 채
황홀한 눈빛으로 앉아있다는 것이다.
‘오빠 멋져....’
라는 표정으로.
그나마 다행인 건
그 중 민아양이 끼어있지 않다는 것이다.
흠.... 그런데 민아는 지금 뭐하고 있나?
민아 - 악!!
??!!
갑자기 연습실 한 쪽에서
그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.
난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
그녀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.
민아
- 악! 엑! 아~!! 악!!
아~ 요즘 왜 이렇게 목소리가 안 나오죠?
연출 - .... 내가 볼 땐 충분히 잘 나오는데?
민아 - 아녜요. 뭔가 좀 빈 소리가 난다고요.
....... 사람 놀라게 하지 말란 말이다~!!
지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자는
예전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어발음을 과시하던
연극부의 캡틴으로
올해로 5년 째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
언제 졸업할 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고 한다.
현재 연극 연출과 준비를 맡고 있으며
취미는 술 마시기와 해장하기라고 한다.
민아 - 아~ 에~~ 이~ 오~. 악, 악.
연출 - 민아야, 그만해라. 내 머리가 다 울린다.
회계 - 그러게 어제 작작 마시라니까.
연출 - 응? 넌 또 언제 왔냐?
새롭게 등장한 한 남자.
연극부의 노장 쌍두마차다.
딱 보는 순간 인텔리하다는 생각이 들만큼
깔끔하고 시원하게 생긴 이 사람은
연극부의 재정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며
연출과 대작을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간이라고 한다.
회계
- 내 참... 아직까지 술 냄새가 풀풀 나네.
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나오지....
연출
- 갑자기 막걸리 마시고 싶다고
포천까지 사람을 끌고 간 게 누군데 그러냐?
회계 - 난 그냥 맛이나 보러 가자는 거였지!
연출 - 그 맛있는 걸 어떻게 맛만 보고 와!
회계 - ...... 맛있긴 맛있더라.
연출 - ...... 한 번 더 갈까?
회계 - 그 쌉싸름하면서 걸죽하게 넘어가는....
김양 - 시끄러.
조금만 더 있으면 연습을 팽개치고
포천으로 직행할 것 같던 두 사람의 대화를
김양이 종식시켰다.
연출
- 야, 지난번에도 말했지만
그래도 내가 선밴데 너 정말....
김양 - ....때린다.
연출 - 아니, 그게, 그러니까.....
김양 - 맞을래?
연출 - .....아니.
보통 다섯 글자 안에 말을 마무리 하는 김양.
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
서늘하면서도 강한 눈빛이
굉장히 카리스마 있어 보인다.
창백하다는 느낌이 들만큼 흰 피부에
차분하게 가라앉은 새카만 머릿결은
청초하다는 느낌까지 드는 데
평소 분위기는 여자 깡패다.....
연출 - 아이씨..... 모두 10분간 휴식!
결국 그녀의 파워에 눌린 연출이
도망치듯 10분간 휴식을 외쳤다.
이제야 내가 움직일 때가 왔군.
기억 - 음료수 사왔습니다.
부원들 - 오오! 신입!
연습시간 도중에 사놓은 음료수 PET를 꺼내놓자
순식간에 사람들이 저글링처럼 모여들었다.
사실 처음 목표는
연습을 마친 그녀에게 음료수를 주는 것이었지만
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
이렇게 간접적인 방향을 택하게 된 것이다.
그래도 못내 미련이 남아
딸기우유 한 개를 따로 사왔지만
그건 주머니 속에 곱게 모셔둔 채
집에 가서 내가 마셔야 할 것 같다.
아직 그녀가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니까...
그걸 확인하는 게 최우선 과제다.
하지만.... 누구에게 물어보지?
본인에게 물어보기는 너무 뻘쭘하고...
안군 - 땡큐, 잘 마셨다.
주머니 속에 든 우유팩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
안군이 내 어깨를 가볍게 톡 치며 지나갔다.
기억 - 저, 선배!
안군 - 응?!
내가 자신을 부를 것이라고는
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
그는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.
그래, 이 사람한테 물어보자.
평소에 민아랑 가까이 지내는 것 같기도 하고..
안군 - 왜?
기억 - ....
난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 봐
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
두어 걸음 다가갔지만
그와 정확히 같은 템포로
안군은 두 걸음 물러섰다.
....뭐하자는 거야.
지금 날 경계하는 거야? 그런 거야?
안군 - 나는 마시면 안 되는 거였어?
기억 - 아니 그게 아니라.....
아무래도 내가 너무 긴장해서
눈에 힘이 좀 들어갔었나 보다.
기억 - 혹시.... 민아양 지금 남자친구 있습니까?
안군 - .........
긴 시간 마음속에 담아뒀던 질문을
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나마 했다는 사실에
난 뿌듯함과 두근거림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.
그래, 대답은 하늘에 맡길 일이고
이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이었냐.
하지만 질문을 받은 그의 표정은 미묘했다.
상당히 착잡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짓는
‘인생이 그렇지...’ 라는 듯한 표정.
그리고 흘깃 나를 돌아보는 눈빛은
‘자식... 힘 내 인마.’ 라고 말하고 있었다.
있는 거야?...... 그런 거야?
처음 내 딛는 한 걸음이 꼬인 거야?
안군 - 없어. 그런데..... 포기하는 쪽이 편할 걸?
그건 굉장히 의미심장한 한 마디였다.
‘저... 이쪽으로 가면 그 마을에 갈 수 있나요?’
‘있어요. 그런데... 포기하는 쪽이 좋을 걸요.’
여느 모험물 같은 곳에서 많이 나오는 유형의 대사.
‘지금 그곳엔 사악한 대마왕이....’
‘지금 그곳엔 치명적인 전염병이...’
‘지금 그곳엔 큰 전쟁이....’
‘지금 그곳에선 밤마다 사람이 없어져요.’
뭐야 대체.
왜 포기하라는 거야?
전염병 걸린 대마왕이랑
큰 전쟁을 치르느라
밤마다 사람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는 거야?
....그거 무서운 걸.
아니지, 아니지...
내가 지금 어딜 가려는 게 아니잖아.
설마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민아양의 친부모거나
혹은 그 반대의 경우인가?
아냐, 그런 출생의 비밀을 안군이 알 리가 없어.
이건 민아와 나, 둘만의 비밀....
젠장!! 몰입하지 마~!!!
안군의 미심쩍은 한 마디로 인해
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카오스 상태로 치달았다.
한참 후
집안 가계도를 재구성해보고
그녀가 남자일 가능성까지 추정해본 후에야
난 마음을 가라앉히고
평상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.
설마 그녀가 나의 친아버지였다니.
..... 아직 제정신이 아니다.
그렇게 내가 산만과 혼란의 풍랑을 헤치고 나왔을 땐
어느새 그녀가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.
민아 -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?
기억 - 아, 아버지....
민아 - ....아빠 생각이요?
기억 - 네.
X 될 뻔 했다.
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.
뭐가 아버지고 출생의 비밀이야?
둘이 동갑이잖아 동갑!!
기억 - .....설마 클론? (복제인간)
민아 - ....네?
기억 - 아, 아닙니다. 아무것도....
민아 - 흠....
잠시 내말을 곱씹어보던 그녀는
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지
그냥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.
민아 - 어때요? 있을 만해요?
기억 - ...네.
민아 - .......음.... 그래요?
기억 - 네.
민아 - 아....네...
이러면 안 되는데.
뭔가 재밌게 이야기도 좀 해주고
말을 이어나가야 하는데
도저히 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.
난 손으로 무릎을 꽉 움켜쥐며
바짝 마른 혀를 입안에서 한 번 굴렸다.
잠시 후면 그녀는 일어서 버릴 것이다.
마땅히 할 말이 없으니까.
나랑 같이 있으면 어색하니까.
.....싫다.
기억 - 저.. 이거...
난 목이 턱 막히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며
감춰놨던 우유를 그녀에게 건넸다.
너무 뜬금없는 짓인가?
너무 유치한가?
서투르다... 너무....
안군은 이런 내 성격을 알고
그런 소리를 했던 걸까.
민아 - 어? 저 주시는 거예요?
기억 - 지난번에.... 우유 좋아하신다고 해서....
민아 - 아......
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
물끄러미 우유팩을 내려다보았다.
머쓱한 기분이 든 난 고개를 돌린 채
재촉하듯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였다.
민아 - ...고마워요.
기억 - 큼, 큼..
내가 헛기침을 하며 쑥스러움을 달래고 있을 때
우유를 받아든 그녀도 부끄러운 듯
오른 손등으로 왼쪽 뺨을 쓱쓱 문지르더니
이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.
줬다. 헤에.
================참... 순박한 놈일세. ==============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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